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로디노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최소 20만, 최대 30만 명에 달하는 양군이 맞붙은 보로디노 전투는 양 측에게 참혹한 손실을 입혔다. 러시아군은 44,000 - 58,000명 전사, 부상 및 포로가 발생했고, 프랑스군은 35,000 - 60,000명 전사, 부상 및 포로가 발생했다. 쿠투조프도 검토 결과 새로운 지원 병력으로 전력이 증강되기 전까지는 나폴레옹과 대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는 모스크바를 방어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9월 14일, 러시아군은 [[청야전술|수도를 통과하며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날 저녁,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토록 숱한 역경을 강요했던 목표는 이제 나폴레옹의 것이 되었다. [[파일:B9B04DDF-5056-A853-0E92BB04A9164483_fullpage.jpg]] [[붉은 광장]]에 접어드는 나폴레옹과 그 부대들. 붉은 광장은 소련 이전의 제정시절부터 그 이름으로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이 들어온 날 모스크바 곳곳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나폴레옹은 불길이 잡힌 뒤 말을 타고 도시로 입성해 크렘린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장소에서 불길이 솟는 것을 목격했고, 러시아인들이 의도적으로 불을 놓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에 나폴레옹은 불을 놓으려다 잡힌 자들을 모조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한동안 크렘린에 남아 있었다가 참모진의 거듭된 간언에 못이겨 그곳을 잠시 탈출했다. 이 불길은 나흘 간 지속되며 도시의 4분의 3을 파괴했다. 이제 뼈대만 앙상한 도시를 재점령한 프랑스군은 진을 친 채 확신을 품고 러시아 황제의 항복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러시아군의 공격에 대비해 군대를 시 외곽에 원형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모스크바와 인접한 병력은 정기적인 식량 공급을 받았지만 외곽부대는 그렇지 못했다. 이때문에 그들은 먹을 것을 찾아 흩어졌다가 적의 습격으로 소모되어갔다. 나폴레옹은 수차례 화평을 촉구하는 사자들을 파견했지만 아무런 회신을 받지 못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로리스통 장군을 쿠투조프에게 보냈다. 로리스통이 쿠투조프를 만나보고 와서 러시아 황제에게 연락이 갔다고 알리자, 나폴레옹은 기뻐했다. 나폴레옹은 곧 바림직한 전쟁 종식이 이뤄질 거라고 확신하고 회신이 도착할 때까지 후퇴에 대한 생각을 접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달리, 러시아 황제는 화평을 맺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쿠투조프가 프랑스 사절을 만났다는 것에 분노해 그에게 "적과 화친하려 했다." 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황제의 강력한 전투 의지 때문에 프랑스 사절단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고, 카자크 기병대는 프랑스군의 보급로를 매번 습격해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결국 나폴레옹은 화평의 희망이 사라졌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10월 19일에 모스크바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프랑스군은 러시아를 빠져나오는 내내 엄청난 추위와 러시아군의 추격으로 인하여 괴멸되었다. 결국 러시아 국경을 넘어 폴란드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병력은 9만 2천 명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